너 없이 걸었다 - 허수경 지음/난다 |
난다의 >걸어본다< 뮌스터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
너 없이 걸었다.
시를 읽으며 걸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 안에서 걸었다.
당신과 나와 시詩, 그리고 뮌스터!
*
난다의 걸어본다 그 다섯번째 이야기.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23년째 살고 있는 뮌스터를 배경으로 그네가 천천히 걷고 깊숙이 들여다본 그곳만의 사람들과 그곳만의 시간들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술술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매 챕터마다 그네가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시가 한 편씩 실리는데, 이는 그네가 알고 있고 알게 된 독일만의, 뮌스터만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꽤 요긴하게 쓰인다. 그네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들의 시가 좁게는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되어 ‘도시’로 성장해가며 오늘날 인구 삼십만 명을 이룬 뮌스터를 테마로 삼고 있는데다 크게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주요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나,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p26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의 낯선 이름도 그네를 따라 발음해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에게 관심이 간다. 우리가 안네 프랑크에게 관심을 두는 동안 철저히 외면당해온 소녀. 열여덟 나이에 전쟁병이라는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은 소녀. 루마니아 체르노비치 출신의 독일계 소녀. 열다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한 권의 시집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고 죽은 소녀. 연인 피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운명이었고, 그는 제 운명을 예감한 듯 그 시집 원고를 소녀의 친구에게 맡겼다 한다. 피히만이 탄 배는 결국 침몰해버렸지만, 소녀의 친구 덕에 시집 원고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폴란드를 지나 헝가리로, 체코로,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는 긴 여행 동안 친구의 배낭에 들어 있던 소녀의 시집 원고. 훗날 은행원이 된 친구 덕분에 소녀의 시집은 은행 금고 속에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었고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듯 긴긴 소녀의 사연을 길게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선연히 저 벽돌담처럼 햇살을 받으며 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들이 있는 어느 날. 마음의 지층 아래에서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것에게 붙일 이름이 있다면 그리움이라는 이름 말고 또 어떤 이름이 있으리." -p117
*
한때 우리는 독일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안으로야 어떤 변모를 앓고 있었을지 모르나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독일이 벽을 깨부수는 동안, 한국이 철조망을 조이는 동안 한국, 그것도 진주라는 소도시의 한 시인이 독일, 그것도 뮌스터라는 소도시로 학생이 되어 떠났다. 1992년의 일이었고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은 그네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그네는 한국을 떠나서는 못 사는 여인이라고, 특히나 우리말로 시 다루는 데는 타고났고, 우리 음식이라면 뭐든 척척 다 잘해내는데다 무엇보다 우리네 모든 글쟁이들을 무조건 덮어놓고 사랑하는 그네가 어떻게 독일 여인이 될 수 있겠냐며 돌아올 거라고, 그것도 일찌감치 다 때려치우고 금세 돌아오고 말 거라 했다지만 그네는 23년째 한국을 떠나 아직도 그곳에 있다. 몇 년을 더 보태면 인생의 절반가량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 된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은 어쩌면 그런 그네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열쇠구멍 혹은 바늘구멍 정도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건 그네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곳이 여전히 한국이며, 독일 곳곳을 홀로 걷고 있으나 텅 빈 그네의 옆구리 대신 그네 마음은 여전히 그네만의 ‘당신’으로 꽉 차 있었다는 사실 정도랄까.
*
『너 없이 걸었다』는 한 권의 에세이로 지칭되고 있지만 동시에 시집이자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일이라는 나라를 다룬 독일만의 총체적인 문화백과사전이다.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있어 그 사유는 깊고 그 문장은 미려하다. 새로 산 하이힐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조심스럽고 단정하기보다 오래 신고 적당히 닳은 운동화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유연하면서도 자유롭다. 그럼에도 늘 하고자 하는 말의 축과 의지의 깃대를 찾을 줄 알고 흔들 줄 안다. “유혹하는 로렐라이. 시는 유혹하는 어지러운 글”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그네를 아름다운 나그네로 칭할 수 있는 데는 그네만의 사람됨을 우리가 익히 알기도 하는 연유다. 그네는 말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인간은 언제나 따뜻하게 닿는 거, 이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의 기반이지요.”라고. 따뜻함, 인간, 닿음, 믿음, 기반, 이 말들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책에서 도저히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대목들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띠는데 이는 이방인으로, 점점 우리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말을 고파하고 우리말의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그네의 고독이 빈번히 들키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네는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했다. “고독에는 대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네를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 ‘시’가 있어서라는 고백을 서두부터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곳까지 가서 시라니, 그곳에서마저 시라니,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이방의 순간들. 시들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갑자기 가슴에 먹먹하게 차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천생 시인 허수경.
*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을 묻고 ‘삶’을 묻고 ‘별’을 묻고 ‘존재’를 묻고 ‘상처’를 묻고 ‘죽음’을 묻는다. 그네가 그네에게 던지는 자문인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읽어나가는 우리에게는 질문에 질문이 된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네의 질문.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줄 아는 그네. 사는 게 추하다 할지라도 시가 있어 ‘위로’를 배운다는 그네. 그런 그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은 또한 계속될 수 있을 거란 데서 희망을 배우게 하고, 사랑이 끝났으니 사랑했던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음으로 절망을 배우게 한다. “그는 ‘너’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랑은 그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네에게 ‘사랑’은 이렇게나 ‘시’로 다다. ‘시’로 전부 다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할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뮌스터는 그대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그 도시를 그대 없이 참 오랫동안 걸어왔다. 모든 평범한 이 세계의 도시, 혹은 저 하늘의 별들이 걷는 것처럼. - p33
너를 생각하면서 걷는다. 너는 언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재중.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온다. 이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 - p76
*
“대충 잡아 열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당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네이기에 이 책에 담긴 한국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음을 안다. 물리적 시간적 제약은 있으나 우리의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실시간으로 함께 살아내면서 그네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자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방법이 없을까 늘 두리번거리는 또 한 명의 품성 넉넉한 대모를 자처해왔다. 어쩔 수가 없다. 그네의 눈에는 그 수가 보일 수도 있는 탓이렷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담함을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 p91~92
우리는 잊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뭔가를 철저하게 잊음으로 사라지게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반복되는 맹세는 얼마나 쉽게 우리가 잊어버리는지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p171
*
그네를 이야기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손’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내민 그네만의 말 또한 손의 일환이기도 하지 않는가. 손은 손을 낳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굴러떨어져 깨어지는 불안한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서로의 손을 맞으면서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시작되고, 손은 서로 맞잡는 순간, 인간을 인간에게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이 된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 또한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말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한들 무리는 없지 않을까. 서로에게 서로의 손이 안전하다 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평화가 아닌가. 이 거리에서 잡아야만 하는 당신의 손, 그 안전함. 그만큼 떨리는 내 손, 그 불안함.
한 인간이 타인의 손을 잘 잡는 일은 사건이다. 일생에 진심으로 우리는 몇몇의 손을 잡았을까.
다만 몇 손.
다만 죽음과 사랑에 닿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민 손.
그 울퉁불퉁한 노동으로 미워진 손.
타인의 손을 끌어안고 차가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이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리라. - p176
아직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너에게로 가지 못할 이유가, 내 속을 다 걸어보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그네의 이야기를 우린 아무래도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듯하다. 아니 그래야 알 듯하다. 그네만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그 진심을.
저자 소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를 하는 것을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등을 펴냈다. 뮌스터라는 독일의 어느 오래된 도시를 걸으면서 나는 이 도시에 살던 이들의 영혼이 보고 싶었다. 도시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므로 그들이 없었다면 이 도시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영혼이 독일어로 쓰인 시들과 겹쳐질 때 현대의 도시는 차갑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시들은 이미 이 세계에 더이상 살지 않는 시인들이 쓴 것이었다. 시라는,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영혼을 동반하고 걸은 셈이었다. 그 너머에는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이 에세이에 담고 싶었지만 의욕은 앞서고 필력은 뒤쳐졌다. 이 에세이는 어느 도시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사라진 것들이 남긴 영혼의 어른거림을 붙잡으려고 한 기록이다. 헐겁고 느슨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에 있는 많은 창문처럼 빽빽한 글은 어쩌면 그 도시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 창문 뒤에는 너도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 에세이가 창문 뒤에 사는 너를 조금 더 닮았으면 했다.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
너 없이 걸었다.
시를 읽으며 걸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 안에서 걸었다.
당신과 나와 시詩, 그리고 뮌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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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걸어본다 그 다섯번째 이야기.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23년째 살고 있는 뮌스터를 배경으로 그네가 천천히 걷고 깊숙이 들여다본 그곳만의 사람들과 그곳만의 시간들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술술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매 챕터마다 그네가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시가 한 편씩 실리는데, 이는 그네가 알고 있고 알게 된 독일만의, 뮌스터만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꽤 요긴하게 쓰인다. 그네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들의 시가 좁게는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되어 ‘도시’로 성장해가며 오늘날 인구 삼십만 명을 이룬 뮌스터를 테마로 삼고 있는데다 크게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주요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나,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p26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의 낯선 이름도 그네를 따라 발음해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에게 관심이 간다. 우리가 안네 프랑크에게 관심을 두는 동안 철저히 외면당해온 소녀. 열여덟 나이에 전쟁병이라는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은 소녀. 루마니아 체르노비치 출신의 독일계 소녀. 열다섯 살부터 쓰기 시작한 한 권의 시집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고 죽은 소녀. 연인 피히만은 팔레스타인으로 떠날 운명이었고, 그는 제 운명을 예감한 듯 그 시집 원고를 소녀의 친구에게 맡겼다 한다. 피히만이 탄 배는 결국 침몰해버렸지만, 소녀의 친구 덕에 시집 원고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폴란드를 지나 헝가리로, 체코로,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는 긴 여행 동안 친구의 배낭에 들어 있던 소녀의 시집 원고. 훗날 은행원이 된 친구 덕분에 소녀의 시집은 은행 금고 속에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었고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듯 긴긴 소녀의 사연을 길게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선연히 저 벽돌담처럼 햇살을 받으며 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들이 있는 어느 날. 마음의 지층 아래에서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것에게 붙일 이름이 있다면 그리움이라는 이름 말고 또 어떤 이름이 있으리."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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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는 독일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안으로야 어떤 변모를 앓고 있었을지 모르나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독일이 벽을 깨부수는 동안, 한국이 철조망을 조이는 동안 한국, 그것도 진주라는 소도시의 한 시인이 독일, 그것도 뮌스터라는 소도시로 학생이 되어 떠났다. 1992년의 일이었고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은 그네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그네는 한국을 떠나서는 못 사는 여인이라고, 특히나 우리말로 시 다루는 데는 타고났고, 우리 음식이라면 뭐든 척척 다 잘해내는데다 무엇보다 우리네 모든 글쟁이들을 무조건 덮어놓고 사랑하는 그네가 어떻게 독일 여인이 될 수 있겠냐며 돌아올 거라고, 그것도 일찌감치 다 때려치우고 금세 돌아오고 말 거라 했다지만 그네는 23년째 한국을 떠나 아직도 그곳에 있다. 몇 년을 더 보태면 인생의 절반가량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 된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은 어쩌면 그런 그네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열쇠구멍 혹은 바늘구멍 정도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건 그네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곳이 여전히 한국이며, 독일 곳곳을 홀로 걷고 있으나 텅 빈 그네의 옆구리 대신 그네 마음은 여전히 그네만의 ‘당신’으로 꽉 차 있었다는 사실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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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는 한 권의 에세이로 지칭되고 있지만 동시에 시집이자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일이라는 나라를 다룬 독일만의 총체적인 문화백과사전이다.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있어 그 사유는 깊고 그 문장은 미려하다. 새로 산 하이힐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조심스럽고 단정하기보다 오래 신고 적당히 닳은 운동화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유연하면서도 자유롭다. 그럼에도 늘 하고자 하는 말의 축과 의지의 깃대를 찾을 줄 알고 흔들 줄 안다. “유혹하는 로렐라이. 시는 유혹하는 어지러운 글”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그네를 아름다운 나그네로 칭할 수 있는 데는 그네만의 사람됨을 우리가 익히 알기도 하는 연유다. 그네는 말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인간은 언제나 따뜻하게 닿는 거, 이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의 기반이지요.”라고. 따뜻함, 인간, 닿음, 믿음, 기반, 이 말들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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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책에서 도저히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대목들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띠는데 이는 이방인으로, 점점 우리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말을 고파하고 우리말의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그네의 고독이 빈번히 들키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네는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했다. “고독에는 대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네를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 ‘시’가 있어서라는 고백을 서두부터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곳까지 가서 시라니, 그곳에서마저 시라니,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이방의 순간들. 시들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갑자기 가슴에 먹먹하게 차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천생 시인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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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을 묻고 ‘삶’을 묻고 ‘별’을 묻고 ‘존재’를 묻고 ‘상처’를 묻고 ‘죽음’을 묻는다. 그네가 그네에게 던지는 자문인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읽어나가는 우리에게는 질문에 질문이 된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네의 질문.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줄 아는 그네. 사는 게 추하다 할지라도 시가 있어 ‘위로’를 배운다는 그네. 그런 그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은 또한 계속될 수 있을 거란 데서 희망을 배우게 하고, 사랑이 끝났으니 사랑했던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음으로 절망을 배우게 한다. “그는 ‘너’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랑은 그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네에게 ‘사랑’은 이렇게나 ‘시’로 다다. ‘시’로 전부 다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할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뮌스터는 그대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그 도시를 그대 없이 참 오랫동안 걸어왔다. 모든 평범한 이 세계의 도시, 혹은 저 하늘의 별들이 걷는 것처럼. - p33
너를 생각하면서 걷는다. 너는 언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재중.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온다. 이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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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잡아 열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당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네이기에 이 책에 담긴 한국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음을 안다. 물리적 시간적 제약은 있으나 우리의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실시간으로 함께 살아내면서 그네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자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방법이 없을까 늘 두리번거리는 또 한 명의 품성 넉넉한 대모를 자처해왔다. 어쩔 수가 없다. 그네의 눈에는 그 수가 보일 수도 있는 탓이렷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담함을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 p91~92
우리는 잊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뭔가를 철저하게 잊음으로 사라지게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반복되는 맹세는 얼마나 쉽게 우리가 잊어버리는지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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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를 이야기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손’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내민 그네만의 말 또한 손의 일환이기도 하지 않는가. 손은 손을 낳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굴러떨어져 깨어지는 불안한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서로의 손을 맞으면서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시작되고, 손은 서로 맞잡는 순간, 인간을 인간에게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이 된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 또한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말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한들 무리는 없지 않을까. 서로에게 서로의 손이 안전하다 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평화가 아닌가. 이 거리에서 잡아야만 하는 당신의 손, 그 안전함. 그만큼 떨리는 내 손, 그 불안함.
한 인간이 타인의 손을 잘 잡는 일은 사건이다. 일생에 진심으로 우리는 몇몇의 손을 잡았을까.
다만 몇 손.
다만 죽음과 사랑에 닿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민 손.
그 울퉁불퉁한 노동으로 미워진 손.
타인의 손을 끌어안고 차가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이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리라. - p176
아직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너에게로 가지 못할 이유가, 내 속을 다 걸어보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그네의 이야기를 우린 아무래도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듯하다. 아니 그래야 알 듯하다. 그네만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그 진심을.
저자 소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를 하는 것을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등을 펴냈다. 뮌스터라는 독일의 어느 오래된 도시를 걸으면서 나는 이 도시에 살던 이들의 영혼이 보고 싶었다. 도시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므로 그들이 없었다면 이 도시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영혼이 독일어로 쓰인 시들과 겹쳐질 때 현대의 도시는 차갑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시들은 이미 이 세계에 더이상 살지 않는 시인들이 쓴 것이었다. 시라는,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영혼을 동반하고 걸은 셈이었다. 그 너머에는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이 에세이에 담고 싶었지만 의욕은 앞서고 필력은 뒤쳐졌다. 이 에세이는 어느 도시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사라진 것들이 남긴 영혼의 어른거림을 붙잡으려고 한 기록이다. 헐겁고 느슨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에 있는 많은 창문처럼 빽빽한 글은 어쩌면 그 도시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 창문 뒤에는 너도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 에세이가 창문 뒤에 사는 너를 조금 더 닮았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