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7

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새로운 계급투쟁 - 10점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자음과모음
유럽은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자본이 세계의 전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간결하고, 부드럽고, 예리하다.” ― Basler Zeitung
“파리 테러를 고찰한 강력한 에세이.” ― Stuttgarter Zeitung
“현재를 향한 분노, 그러나 미래를 보는 충만한 희망.” ― Berliner Zeitung

“파리 테러가 벌어진 다음 날, 한 난민이 텔레비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진리가 번쩍이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희생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계적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해야 마땅하다.“
― 본문 117쪽

「새로운 계급투쟁」은 전후 유럽 최대의 위기로 평가되는 난민 문제에 얽힌 모든 층위의 논의를 구체적이고도 과감하게 시도한 논쟁적 문건이다. 2015년 12월 21일 독일에서 첫 출간되었다.
출간의 직접적 계기는 11월 13일 파리 테러였고, 작년 3월 출간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독일, 한국, 스페인 동시 출간) 역시 1월의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 책에서 이미 “이 사건을 감싸는 큰 흐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고 밝힌 지젝은 「새로운 계급투쟁」에서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한층 폭넓고 심층적 해부를 시도한다. 9개의 핵심적 주제를 통해 현실 왜곡의 주범인 신비화된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해부하면서 ‘사회와 경제의 구체적 분석’을 위한 ‘난민의 정치경제학’을 시도한다. 인류의 상호공존에 필요한 근본적 질문이 절실한 시점에서 나온 철학자의 통렬한 문명비판이자 유럽인의 냉정한 자기비판이다.

“우리를 구원할 것은 반복을 통한 복원이다. 즉 ‘유럽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에게 유럽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듭된 물음으로 유럽의 전통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19쪽)

[출판사 리뷰]
난민과 이슬람 테러리즘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유럽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대규모 난민과 이슬람 테러리즘은 유럽을 전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연민과 동정만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즉 이슬람 테러리즘과 마찬가지로 난민의 물결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징후라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기본 바탕은 계급투쟁이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정부는 기득권 집단에만 봉사하는 마당에 사회가 분열하며, 극단적 인간이 되거나, 더 낫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려는 현상은 놀라운 일일까? 따라서 민주주의, 자유, 평등의 가치에 대한 서구인들의 주장은 아무리 그 가치가 바람직하게 존재할지라도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서구사회에 진정 위협이 되는 것은 난민의 유입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학관계에서 기인하며, 이는 전 지구적 근본주의의 출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로부터 다음 두 가지 불편한 필연성이 명백해진다 :

1. 우리는 테러리즘과 난민의 물결 뒤에 있는 경제적 원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문화적, 자연적, 인간적 재화를 해방시키는 새롭고 보편적인 공산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

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좌파적 사회적 금기들을 제거해야 한다. 새롭게 도착한 외국인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맹목적 공감만으로는 건설적인 상호공존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개성을 더 객관적으로 수용하고 문화적 차이를 더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까지 인정해야만 -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줄 ‘주도 문화’가 생길 수 있고, 바로 그 초석 위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슬람 투사와 대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서구)의 생활양식과 가치를 보존하고, 그것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세계를 가진 자와 소외된 자로 나눌 권리는 없다. 유일한 진정한 보편주의는 정의를 세우려는 투쟁에서만 성립한다. 우리는 모두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자본주의 체계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 서평 : 인현정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과정)

현실 속에서 천착한 지젝의 사유

지난해 1월 파리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경험했고, 다시금 11월 또 다른 테러를 겪었다. 연이은 유럽사회의 불안은 지젝으로 하여금 다시금 펜을 들게 했고, 이 책은 지난 12월 21일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서두는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지젝은 그녀가 『죽음과 죽어감에 관하여』에서 제시한 불치병에 대응하는 5가지 단계 - ①부정, ②분노, ③타협, ④우울, ⑤수용 - 를 인용하면서 난민 행렬을 바라보는 서구의 반응도 이 다섯 단계 감정이 혼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질문한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다섯 번째 ‘수용’의 단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이 나타난다면, 이는 유럽이 어떻게 일관된 계획 속에서 난민을 다루게 될지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식은 작년 9월 9일, 지젝이 <런던 북리뷰>에 기고한 ‘노르웨이는 없다’에서 이미 인용된 바 있다. 이 글에서 이미 지젝은 좌파 자유주의자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는데 놀랍게도 11월 13일 금요일 파리에서 다시금 ‘심판받아야 마땅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다. 또한 파리 테러 직후인 11월 16일, 미국의 진보적 월간지인 <이 시대>에 ‘좌파는 서구 좌파의 뿌리를 포용해야 한다’고 기고했고, 이 글의 일부 역시 다시금 등장한다.

유토피아의 역설
지젝이 이 책을 통해 일련의 테러를 진단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난민은 단지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향을 피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왔고, 그러기에 그들은 단지 서구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탈리아에 머무르지 않고 스칸디나비아에서 살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젝은 바로 이 점에서 유토피아의 역설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가난, 고통,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오히려 ‘절대적 유토피아’가 폭발한다. 노르웨이는 없다. “난민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본문 66쪽).

문화전쟁과 계급투쟁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은 이번 파리 테러가 갖는 상징성이 이전의 양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전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군사적 혹은 정치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대상을 공격했다. 하지만 올해 테러 대상이 된 곳은 레스토랑, 록 콘서트홀 등 일상생활의 공간이자 대중문화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2015년 상반기에 유럽은 주로 급진 해방운동에 몰두한 반면, 하반기에는 난민의 ‘인도주의적’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계급투쟁은 관용과 연대라는 자유주의적-문화적 주제에 그야말로 압도당하고 밀려났다”는 것이다(115~116쪽). 그는 문화전쟁과 이타적 가치가 오히려 사회를 재건하려는 노력이나 난민들이 더 이상 강제로 떠돌지 않아도 되는 기반을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금 레닌의 질문인 ‘무엇을 할 것인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군사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럽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젝는 먼저 마르크스 이론가이자 문학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의견을 제시한다. 지젝은 계속되는 유럽의 난민 위기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대안 - 거대한 규모의 조직화와 조직 - 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유럽에서 지속될 난민 위기는 정확히 이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하리라”(103쪽).

최소한의 규범
또한 지젝은 무슬림과 서구 자유주의자의 상호공존에 필수적인 두 가지를 언급한다. “이슬람이 서구의 신성모독적 이미지와 냉소적 유머를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서구 자유주의자도 이슬람의 많은 풍습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이 그것이다. 둘째,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 이런 규범과 소통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법적 강제력을 집행해야 한다”(105~106쪽).

이타주의의 한계
마지막으로 지젝은 지금 우리에게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진보 좌파에 만연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불평과 상황을 윤리화시키는 것 - 유럽은 공감을 상실했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등 - 은 반이민주의 폭력의 반대급부일 뿐이다”(106쪽). 결국 이러한 막다른 상황을 깨는 방법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서는’ 일이다. “단순하게 서로 존중하는 선에 그치지 말고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공동의 문제다!”(107쪽).

네 가지 적대성
그렇다면 새로운 ‘공산주의 이념’을 절박한 현안으로 부상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지젝은 말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계속되는 자본주의 지배를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그 무한 재생산을 막을 충분히 강한 적대성을 찾을 것인가? 적대성은 네 가지다. 생태 파국의 위기, 이른바 ‘지적재산권’의 사유재산화, 새로운 기술-과학 발달이 초래할 사회윤리적 영향(특히 유전공학), 마지막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적대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새로운 장벽과 슬럼이다”(110쪽).

순수한 자발성
그는 공산주의의 재창조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그는 간디의 좌우명을 인용해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 발전의 내적 동력은 그 자체로 움직이며 파국과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러므로 이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자발성, 역사적 필연성에 대항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다”(114쪽).

2015년 11월 13일 이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나는 파리다’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며 서로를 위로했다. 지젝에 따르면 국가보다 더 사적인(private) 것은 없지만, 사람들의 감정은 국경의 경계를, 개인적 슬픔의 경계를 부수고 퍼져 나갔다. 진정 파리의 죽음을 비난하고자 한다면, ‘나는 파리다’라는 말이 옳다, 아니 옳아야 할 것이다. 지젝의 말대로, 이슬람 파시스트나 유럽의 반이민 인종주의자들이나 동전의 양면인 것은 사실이니까. 전 지구적 통찰이 없는 파리 희생자들을 향한 무기력한 연대는 가짜 윤리가 지닌 무례함이라고 역설하는 지젝은 분명 용감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그의 호소와, 이용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지구적 연대의 강조, 모두 절실하다. 새로운 계급투쟁, 여전히 생생해야 할 주제임에는 틀림없다.